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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람 너머 오로라, 북두칠성 그리고 집 어느 겨울 밤, 몇일 전에 보였다던 오로라가 너풀거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뒷뜰로 나가 보기로 했다.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도 윙윙 거리는 겨울 바람의 성화가 대단하다는걸 알 수 있었다. 블라인드를 젖히고 패티오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추위를 가득 머금은 강한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나를 쫓던 고양이 두 녀석은 움찔하며 한 걸음 뒤에 멈춰 서있었다. 연신 코를 씰룩 거리며 어두운 뒷뜰과 내 눈치를 번갈아가며 살피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요란스럽게 차가운 이 밤에도 여전한듯 했다. 나는 서둘러 데크 위로 발을 내딛고서 문을 닫았다. 두 녀석은 유리 너머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매번 당하는 일이지만 수긍하기 어렵다는듯한 표정이었다. 곧 나른한 늘.. 2021. 12. 16.
아나 비도비치 (Ana Vidovic)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눈에 띈 애나 비도비치. 물론 미모가 아름답지만 그 보다는 단아하면서도 확고한 연주 자세가 너무도 멋지고 아름답다. 연주 속에는 주저함이나 서두름 혹은 긴장이나 느슨함이 전혀 담겨 있지 않고 표정은 시종일관 변하지도 그대로이지도 않다. 그 표정이 변함이 없는데도 수 십 가지의 다른 느낌이 비친다. 바쁜 손가락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이로 스며 나오듯 울려 퍼지는 차분하고 견고한 음정들. 그 흔한 뭉뚱그려진 소리, 스치듯 단 한 번이라도 내뱉는 일 없이 완벽한 연주가 마무리된다. 처음 들은 곡들도 있지만 마치 내가 그 곡들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인 듯, 흠잡을 데 없는 연주라는 확신이 이리도 강한 감상이다. 넋을 잃고 듣다가 오늘 밤의 대부분을 태워 버렸다. 2021. 5. 6.
늘 헐렁한 옷을 입어야만 했던 연우 씨 연우에게는 옷을 살 때마다 떨쳐버리지 못하는 강박증 같은 것이 있었다. 매번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강박증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야 말았다. 연우의 어릴 적 부모님들은 커다란 양품점을 운영하셨다. 중심 번화가에 있었던 그 양품점은 다양한 연령대의 아동복과 남녀 의류, 잡화, 액세서리와 각종 생활용품은 물론 담배와 고속버스 승차권까지 대행 판매하는 당시로서는 백화점 같은 양품점이었다. 규모가 큰 만큼 직원들도 많아서 한 번에 근무하는 직원 수가 예닐곱 명은 되었다. 기혼자를 빼고는 모두 안집이라고 불리는 매장 뒤의 거주 공간에서 숙식을 해결했으니 실로 대가족이 사는 곳이었다. 그런 고급 양품점 집의 맏아들이던 연우는 어울리지 않게도 늘 헌 옷을 고집했다. 대형 양품점의 안주인이던 연우의 어머니는 .. 2021. 3. 21.
이웃집 클로이-04 조나단은 41살의 남성이다. 알버타주 북부에 위치한 한 원유 공장에서 프로젝트 관리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다. 그 원유 공장은 알버타 오일 앤 가스 컴퍼니 (Alberta Oil & Gas Company) 소유이다. 조나단은 엔지니어링 및 시공 전문 회사인 이피씨 스페셜리스츠 (EPC Specialists)의 직원으로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원유 생산량을 늘리는 작업이다. 18살이 되는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 전기기사 수습직으로서 처음 일을 시작하여 23년간 석유산업분야에서 일을 해오고 있는 베테랑이다. 원유 가격의 상승과 하락에 따라 해고와 재취업을 숱하게 반복하면서도, 동료나 상사들과의 유대 관계가 두텁고 신임이 높아서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금테.. 2021. 1. 9.
이웃집 클로이-03 앤은 가끔 조나단과 전화 통화를 한다. 앤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숙박 손님이 떠난 후 뒷정리를 하느라 바쁠때는 조나단이 건 전화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 조나단은 클로이의 안부가 궁금해서 전화로 확인하곤 한다. 클로이만 생각하면 그저 안쓰러울뿐이다. 클로이의 친엄마인 앤은 에어비엔비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조나단은 클로이의 친아빠지만 지금은 함께 살지 않는다. 컴퓨터 게임을 즐겨하는 앤에게는, 늘 집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에어비엔비 운영이 천직인냥 여겨진다. 1층에 있는 서재를 개조한 방 1개와 워크아웃 형태로 된 지하에 있는 방 2개를 포함해서 모두 3개의 방을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지하에는 욕조가 딸린 욕실과 간단한 취사 시설이 되어 있어 가족이나 4명 정도의 일행이 머물기에 적합하다. 워크아웃.. 2020. 12. 28.
이웃집 클로이-02 챨스릿지 커뮤니티는 대략 1970년대 중반에 형성된 동네이다. 당시의 방식대로, 커뮤니티 내에 같은 모양으로 지은 집은 단 한 채도 없다. 돈 할아버지와 패트리샤 할머니 둘이 사는 집은, 그 주변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1975년에 지어진 2층 집이다. 현재 70대 중반인 이 노부부가 결혼하면서, 새로 지은 지금의 집으로 입주한 이후 40여 년 동안 살고 있다. 그동안 딸 둘과 아들 둘이 모두 장성하여 독립해 나갔지만 이들은 가족들의 모든 추억을 간직한 채 그 집을 지키며 살고 있다. 40여 년의 세월만큼 자란 커다란 나무들이 둘레에 많다. 그런 나무들 사이로 크고 작은 새들의 지저귐과 다툼, 청설모를 닮은 다람쥐와 귀엽지 않은 토끼들의 조심스러운 출몰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노부부의 집 서쪽에는 클로이가,.. 2020. 12. 18.
이웃집 클로이-01 클로이는 캘거리의 챨스릿지 커뮤니티에 살고 있는 20살의 여성이다. 눈처럼 흰 피부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눈부신 금발과 보는 이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짙은 파란색 눈을 가지고 있다. 키는 165 정도이고, 요란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풍만한 가슴과 몸매가 드러나는 꽉 끼는 흰색 티셔츠와 밝은 색의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클로이가 신는 신발은 대부분 하얀색 운동화다. 클로이의 집은, 챨스릿지 로드와 챨스릿지 힐 도로가 만나는 삼거리의 한쪽 모서리에 있는 서향집이다. 그녀의 방은 집의 정면 쪽에 있어서 서쪽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멀리 지평선에 나지막이 들쭉날쭉 솟아 있는 록키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집 앞의 챨스릿지로드 아래로는 경사진 내리막 풀밭이 펼쳐져 있다. 100여 미터 정도 내려간 그 풀밭 끝에는.. 2020. 12. 10.
부정어 (否定語)가 오기 전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싶은 때에, 나는 그이가 이것을 받아줄 수 있을 것인가가 너무도 두려워서 많은 시간을 서성거리기만 하다가 어느 눈이 오려고 잔뜩 찌푸린 날에,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마구 떠들어대던 내 모습을 보았다. ​ 나 이면서도 멀치감치서 바라보는듯한 이 관능적인 엿봄의 즐거움. 무엇이 중요한가. 정말로 무엇이 소중한가. 그렇게 소중한 것을 주었는데도 하나도 아쉽지 않으니...... 나는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이처럼 기꺼워하지도 않는 그대에게 가져다준 것이 정말 내게 소중했던 것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대를 생각하면서도, 다른 이를 대상으로 말을 하고 있으니, 이젠 그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으니. 그 아름다운 "그대"라는 의미의 소중함도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도 알 수가 없으니.. 2020. 11. 27.
비탈길 비탈길을 오른다. 숨이 차다. 고요한 안식 위에 몸을 뉘어본 기억이 아련하다. 혼자 떠난 길이기에 외롭고 힘겹다. 이미 서늘한 계절 속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등을 떠미는 햇살이 맑고 따스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 마음은 벌써 어둠에 대한 근심의 불을 밝히고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곳에 약간의 소금을 뿌려댄다. 내 마음이 몸부림을 친다. 비탈길을 늘어뜨린 산등성이 어느 즈음에서 작지만 풍성하고 기댈만한 나무 하나 만난다. 낮게 드리운 가지에 피곤한 몸을 기대고 잠시 쉰다. 오래지 않아 가지가 휘고, 더 기대면 부러질 것 같아서 몸을 거둔다. 거둔 몸을 소박하게 잘 차려입은 들풀이 두터운 땅 위에 앉힌다. 축축한 기운이 스멀거려도 흔들림은 없다. 축축함이 깊어지면 다시 나무에 기댈지도 모른다. 누군가 .. 2020. 11. 4.
1년 동안 켜 두었던 마음 작은 행복이야기 - 03 올해 "가을이"는 예년보다 조금 늦게 이곳을 떠났다. 뒤이어 찾아온 "겨울이"는 성깔 있는 아이였다. 지난주 내내 눈을 뿌렸다. 그렇다고 펑펑 내릴 만큼 뿌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찔끔거리듯 뿌리던 눈을, 결국 지난 24일 토요일에는 막판 떨이하듯 마구 쏟아부었다. 2020 겨울이의 첫인사였다. 울타리 나무의 잎들이 올해에는 유난히도 끈질기게 달려있다. 늦게 떠난 가을이 때문인지 방심하고 있다가 불쑥 나타난 겨울이의 첫인사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그건 비단 울타리 나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동네 이곳저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다른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낙엽이 아직 다 지지 않았었구나. 작년 성탄절 전에 LED 전구를 설치했었다. 매년 그 맘때가 되면 아무.. 2020.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