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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Writing/수필 Essay

1년 동안 켜 두었던 마음

by Deposo 2020. 10. 28.

작은 행복이야기 - 03

   올해 "가을이"는 예년보다 조금 늦게 이곳을 떠났다. 뒤이어 찾아온 "겨울이"는 성깔 있는 아이였다. 지난주 내내 눈을 뿌렸다. 그렇다고 펑펑 내릴 만큼 뿌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찔끔거리듯 뿌리던 눈을, 결국 지난 24일 토요일에는 막판 떨이하듯 마구 쏟아부었다. 2020 겨울이의 첫인사였다.

 

   울타리 나무의 잎들이 올해에는 유난히도 끈질기게 달려있다. 늦게 떠난 가을이 때문인지 방심하고 있다가 불쑥 나타난 겨울이의 첫인사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그건 비단 울타리 나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동네 이곳저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다른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낙엽이 아직 다 지지 않았었구나. 

 

   작년 성탄절 전에 LED 전구를 설치했었다. 매년 그 맘때가 되면 아무 이유도 없이 마음이 설렌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전구들을 매달았었다. 원유 가격의 폭락으로 오랫동안 경기가 좋지 않아 모두들 우울해했을지도 모를 이곳의 2019년을 떠나보내는 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고 또 받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전구들은 그 해를 지나고 2020년 새해가 와서 2월이 지나도록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앞집의 조셉 할아버지는 2018년 3월 어느 날 돌아가셨다. 올해 3월이 2주기였는데 제니 할머니가 남편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리고 싶었다. 수시로 2층 서재에서 창밖 내다보기를 즐겨하던 조셉 할아버지는 없지만 대신 제니 할머니가 그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눈에는, 우리 집 처마를 빙 둘러서 매달려 있는 전구들의 조잘거림이 늘 따스하고 경쾌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게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불안감과 갇혀 지내야만 하는 여러 이웃들의 눈에 티끌만한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구들을 거두지 않았다. 우리 가족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세상에는 꼭 물질이나 금전이 아니더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율과 생산성을 앞세우는 세상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의 가치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오늘 밤 내리는 눈을 보면서 내일 출근길을 걱정하거나, 뜸해지는 손님으로 떨어지는 매출이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겠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디엔가는 저 풍성한 눈이나 어여쁜 불빛들 때문에 용기를 얻고, 포근한 마음에 위안을 받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추수감사절을 앞둔 어느 날, 벨이 울려 나가 보니 앞집 제니 할머니가 서있었다. 오른손으로 도시락통만한 플라스틱 상자를 받들고 있었다. 할머니가 손수 만든 아몬드 초콜릿 조각들이 담긴 상자임을 단번에 알아봤다. 근황과 안부를 주고받다가 할머니가 떠나면서 남긴 말 한마디가 나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매일 밤마다 아름답게 켜져 있는 저 전구들 때문에 나는 큰 기쁨과 위로를 받는답니다."

 

   나의 마음이 쓸모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너무도 기쁘고 고마웠다. 보통은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고마워한다지만 정작 도움을 주는 사람은 더 큰 고마움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나로부터 전해진 그 무엇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도록 허락해준 그 누군가가 너무도 고맙다. 작지만 너무나도 깊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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