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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어 (否定語)가 오기 전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싶은 때에, 나는 그이가 이것을 받아줄 수 있을 것인가가 너무도 두려워서 많은 시간을 서성거리기만 하다가 어느 눈이 오려고 잔뜩 찌푸린 날에,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마구 떠들어대던 내 모습을 보았다. ​ 나 이면서도 멀치감치서 바라보는듯한 이 관능적인 엿봄의 즐거움. 무엇이 중요한가. 정말로 무엇이 소중한가. 그렇게 소중한 것을 주었는데도 하나도 아쉽지 않으니...... 나는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이처럼 기꺼워하지도 않는 그대에게 가져다준 것이 정말 내게 소중했던 것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대를 생각하면서도, 다른 이를 대상으로 말을 하고 있으니, 이젠 그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으니. 그 아름다운 "그대"라는 의미의 소중함도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도 알 수가 없으니.. 2020. 11. 27.
비탈길 비탈길을 오른다. 숨이 차다. 고요한 안식 위에 몸을 뉘어본 기억이 아련하다. 혼자 떠난 길이기에 외롭고 힘겹다. 이미 서늘한 계절 속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등을 떠미는 햇살이 맑고 따스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 마음은 벌써 어둠에 대한 근심의 불을 밝히고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곳에 약간의 소금을 뿌려댄다. 내 마음이 몸부림을 친다. 비탈길을 늘어뜨린 산등성이 어느 즈음에서 작지만 풍성하고 기댈만한 나무 하나 만난다. 낮게 드리운 가지에 피곤한 몸을 기대고 잠시 쉰다. 오래지 않아 가지가 휘고, 더 기대면 부러질 것 같아서 몸을 거둔다. 거둔 몸을 소박하게 잘 차려입은 들풀이 두터운 땅 위에 앉힌다. 축축한 기운이 스멀거려도 흔들림은 없다. 축축함이 깊어지면 다시 나무에 기댈지도 모른다. 누군가 .. 2020. 11. 4.
어느 기다림의 끝에서 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약속도 없이 헤어졌기에 온다는 것 자체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기다렸다. 나 여기서 기다린다고 알린적도, 기다림이 힘들다고 불평한 적도 없이 기다렸다. 기다린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도 꼭 올 것만 같아서 기다렸다. 나를 둘러싼 소리들을 외면하며 기다렸다. 똑바로 서서 흐트러지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애쓴 만큼 나아지지 않았고, 나아질 만큼 애를 쓰지도 않았던 걸까. 때로 휘청이며 중심을 잡느라 힘겨웠다. 그런데 기다리던 대상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왜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아예 떠올릴 방법이 없었다. 내 삶의 굴곡진 부분을 펴줄 수 있는 이를 기다린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이의 모진 시간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다렸을까. 어느 날 누군가 .. 2020. 10. 23.
사랑 깎기 이제 여름이 한껏 잦아들었는데 거칠고 게으른 기억 속에서, 노란색 몽당연필 모양의 사랑 하나를 본다. 가끔은 가을을 준비하느라 여름에 쏟아 놓은 추억들을 하나둘씩 주워 담는데, 그 뭉뚝한 사랑은 차마 담을 수가 없다. 그해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무렵의 어느 날, 내가 처음 봤던 그 사랑은 짙고 꽉 찬 심지와 단단하고 흠집 없는 샛노란 외모가 눈부신 그런 사랑이었다. 나는 덜컥 그 사랑을 움켜쥐었다. 그 어떤 모양의 그림도, 쓰기 어려운 이야기도 하염없이 그려내고 아름답게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해 여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손에 쥔 사랑이 제법 짧아졌음을 느꼈다. 짧아지고 금이간 심지와 나의 손톱 자국, 이빨 자국 가득한 지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이 마냥 원망스러웠다. 왜 이전과 .. 2020. 9. 23.
그대를 말함 내 영혼이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안식처. 차분한 그늘이 드리운 반듯한 자욱이 있는 곳. 낮이나 밤이나, 늘 기대어 귀기울일 수 있는 이야기를 머금고 있는 사람. 벤치 위의 낙엽을 쓸어 내리듯, 가벼운 세월의 짐일지라도, 나는 어서 달려가 털어주고 싶습니다. 그대여. 2006-11-29 Speaking of Thou A shelter where my soul can seat and lie down, has calm shadow and honest vestige. Day or night, you are the one who always wear endless words that I long for as I lean over on you to taste those. Like sweeping down falle.. 2020.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