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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Writing/사진과 시 Photo & Poem

어느 기다림의 끝에서

by Deposo 2020. 10. 23.

Photo by James Lee on Unsplash

 

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약속도 없이 헤어졌기에 온다는 것 자체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기다렸다.

 

나 여기서 기다린다고 알린적도,

기다림이 힘들다고 불평한 적도 없이 기다렸다.

기다린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도 꼭 올 것만 같아서 기다렸다.

 

나를 둘러싼 소리들을 외면하며 기다렸다.

똑바로 서서 흐트러지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애쓴 만큼 나아지지 않았고, 나아질 만큼 애를 쓰지도 않았던 걸까.

때로 휘청이며 중심을 잡느라 힘겨웠다.

 

그런데 기다리던 대상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왜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아예 떠올릴 방법이 없었다.

내 삶의 굴곡진 부분을 펴줄 수 있는 이를 기다린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이의 모진 시간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다렸을까.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찾아온 꿈을 꾸다가 깼다.

한참을 잔 것 같은데 아직 새벽 3시쯤이었다.

잠이 그득한 눈을 감고, 꿈 머리부터 되살리려 애를 썼다.

애를 쓸수록 잠은 달아났고, 꿈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만 갔다.

의식의 빛이 밝아오자, 초겨울 서리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기다림은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이에 대한 기다림이 아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돌아오는 나에 대한 기다림이다.

내가 돌아오면, 또 하나의 기다림이 움틀 때까지

그 어느 때 보다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Photo by JanFille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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