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름이 한껏 잦아들었는데
거칠고 게으른 기억 속에서,
노란색 몽당연필 모양의 사랑 하나를 본다.
가끔은 가을을 준비하느라
여름에 쏟아 놓은 추억들을 하나둘씩 주워 담는데,
그 뭉뚝한 사랑은 차마 담을 수가 없다.
그해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무렵의 어느 날,
내가 처음 봤던 그 사랑은
짙고 꽉 찬 심지와
단단하고 흠집 없는 샛노란 외모가 눈부신
그런 사랑이었다.
나는 덜컥 그 사랑을 움켜쥐었다.
그 어떤 모양의 그림도,
쓰기 어려운 이야기도 하염없이 그려내고
아름답게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해 여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손에 쥔 사랑이 제법 짧아졌음을 느꼈다.
짧아지고 금이간 심지와
나의 손톱 자국, 이빨 자국 가득한 지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이 마냥 원망스러웠다.
왜 이전과 같지 못하느냐고.
그러던 그해 여름의 열기가 주춤하던 어느 날,
무심코 흰 벽면 가득한 그림과 이야기들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 사랑을 깎아가며 그렸고 써왔던 것들은
포스터물감처럼 짙고 아름다운 노란색이 아니었다.
온통 나의 새까만 이기심들뿐이었다.
나의 욕심이 그 사랑을 뭉뚝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움도 열정도 모두 깎여 버렸다.
몽당연필처럼 깎인 사랑이었다.
이제 차마 담지 못하는 내 뭉뚝한 그 사랑을,
다시 올지도 모를 그 여름에는 되돌릴 수 있을까.
해바라기처럼 길고 꿋꿋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여름에 쏟아 놓을 아름답고 풍성한 추억들을
한가득 칠할 수 있을까.
그 깊고 두터운 소망 하나 이리도 달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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