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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Writing/사진과 시 Photo & Poem

사랑 깎기

by Deposo 2020. 9. 23.

이제 여름이 한껏 잦아들었는데 

거칠고 게으른 기억 속에서,

노란색 몽당연필 모양의 사랑 하나를 본다.

가끔은 가을을 준비하느라

여름에 쏟아 놓은 추억들을 하나둘씩 주워 담는데,

그 뭉뚝한 사랑은 차마 담을 수가 없다.

 

By Solen Feyissa on Unsplash

 

그해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무렵의 어느 날,

내가 처음 봤던 그 사랑은

짙고 꽉 찬 심지와

단단하고 흠집 없는 샛노란 외모가 눈부신

그런 사랑이었다.

나는 덜컥 그 사랑을 움켜쥐었다.

그 어떤 모양의 그림도, 

쓰기 어려운 이야기도 하염없이 그려내고

아름답게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해 여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손에 쥔 사랑이 제법 짧아졌음을 느꼈다.

짧아지고 금이간 심지와

나의 손톱 자국, 이빨 자국 가득한 지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이 마냥 원망스러웠다.

왜 이전과 같지 못하느냐고.

 

By Chris Barbalis on Unsplash

 

그러던 그해 여름의 열기가 주춤하던 어느 날,

무심코 흰 벽면 가득한 그림과 이야기들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 사랑을 깎아가며 그렸고 써왔던 것들은

포스터물감처럼 짙고 아름다운 노란색이 아니었다.

온통 나의 새까만 이기심들뿐이었다.

나의 욕심이 그 사랑을 뭉뚝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움도 열정도 모두 깎여 버렸다.

몽당연필처럼 깎인 사랑이었다.

 

By Gayatri Malhotra on Unsplash

 

이제 차마 담지 못하는 내 뭉뚝한 그 사랑을,

다시 올지도 모를 그 여름에는 되돌릴 수 있을까.

해바라기처럼 길고 꿋꿋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여름에 쏟아 놓을 아름답고 풍성한 추억들을

한가득 칠할 수 있을까.

 

그 깊고 두터운 소망 하나 이리도 달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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