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1 사랑 깎기 이제 여름이 한껏 잦아들었는데 거칠고 게으른 기억 속에서, 노란색 몽당연필 모양의 사랑 하나를 본다. 가끔은 가을을 준비하느라 여름에 쏟아 놓은 추억들을 하나둘씩 주워 담는데, 그 뭉뚝한 사랑은 차마 담을 수가 없다. 그해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무렵의 어느 날, 내가 처음 봤던 그 사랑은 짙고 꽉 찬 심지와 단단하고 흠집 없는 샛노란 외모가 눈부신 그런 사랑이었다. 나는 덜컥 그 사랑을 움켜쥐었다. 그 어떤 모양의 그림도, 쓰기 어려운 이야기도 하염없이 그려내고 아름답게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해 여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손에 쥔 사랑이 제법 짧아졌음을 느꼈다. 짧아지고 금이간 심지와 나의 손톱 자국, 이빨 자국 가득한 지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이 마냥 원망스러웠다. 왜 이전과 .. 2020. 9. 2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