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1.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1장. 인간 본성의 법칙

사람들은 이러한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혹은 규칙'을 '자연법' (Law of Nature)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 (laws of nature)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중력 법칙이나 유전 법칙, 화학 법칙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 전 시대의 사상가들이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을 ' 자연법'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사실상 '인간 본성의 법칙' (Law of Human Nature)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모든 물체가 중력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유기체가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듯이 인간이라고 불리는 생물에게도 그들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 그러나 신체는 중력 법칙에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없어도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 사상가들의 생각이었지요.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혹은 규칙'을 '자연법' (Law of Nature)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 애써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문명과 시대의 도덕 간에 차이가 있기는 해도, 전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한 가지의 법칙, '인간 본성의 법칙', '자연법'만큼은 거부할 수 있다. 최초로 거부한 이들은 바로 하와와 아담이었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말았다. 그런데 그 거부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한 의심'과 '획기적인 능력', '하나님의 간섭 없는 자기 결정권', '하나님과 같은 권능'에 대한 욕망이었다. 나를 높이고, 인정 받고, 대접받고, 칭송받고, 매력적이고 싶은 욕망. 이 욕망은 점점 자라나서 교만이 되고, 궁극적인 타락의 원동력이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하는 광야의 시험을 떠올렸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류 전체를 타락시켰던 그 사탄의 시험은 세 가지였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했다. 둘째, 천사들이 도울 것이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다. 셋째,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 테니 자신에게 절하라고 했다. 첫 두 가지는 물리법칙에 대한 시험이었고, 마지막은 '자연법'에 대한 시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영양분을 섭취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진 인간.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물리적인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정신적인 해결책으로 대응했다. 여기서의 핵심 단어는 '말씀'이다.
다음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몸으로 투신한다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은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대응했다. '믿음'이 핵심 단어다.
나는 종종 사악하게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 · · 를 할테니 · · · 를 주세요.' 그것도 모자라 '망가지면 도와주시는지 안 도와주시는지 보자.'와 같은 미성숙한 신앙의 생떼를 부리기도 했다.
마지막 시험은 절 한 번으로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법' 범주에 속하는, 거부가 가능한, 자기 결정권에 따라 결정되는 유혹이었다.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유혹이 넘쳐나고, 그 유혹이 대수롭지 않다는 인식이 폭넓게 형성되어 있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이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른 것은, 굳이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을 모르는 이상한 사람을 전혀 만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 그러나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른 행동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게 마련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생각이 옳다고 믿습니다. 만약 그 생각이 옳지 않다면 우리가 이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언급해 온 말들은 전부 헛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치도 우리처럼 내심으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들에게 "너희는 그르다"고 말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옳다고 말하는 개념이 그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싸울 수는 있어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카락 색깔을 두고 비난할 수는 없듯이 말입니다. (...)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사람조차 금세 자기 입장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가 남에게 한 약속은 마음대로 어기면서도, 남이 자기한테 한 약속을 어기려고 하면 당장에 "이건 공정치 못해" 하면서 불평을 터뜨립니다.
루이스는 인간의 본성에 선한 정신이 내재한다고 믿고 있다. 물론 사악함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간할 수 있는 분별력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악함이 지배하는 애기들과 아이들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고 '옳고 그름'이라는 것, 즉 '자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 조차도, 자신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에 대해서는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옳고 그름'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옳고 그름'은 취향이나 견해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자연법'을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늘 그것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변명거리들을 늘어 놓는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자연법을 깊이 믿고 있다는 반증이다.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연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토대입니다.
도대체 왜? 이 두가지 사실이 우리 자신과 이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Mere Christianity (C.S. Lewis) - 03
A reflection on the moral law within human nature and how it points to the deeper meaning of humanity and the universe, inspired by C.S. Lewis.
condepark.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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