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름이 한껏 잦아들었는데
거칠고 게으른 기억 속에서,
노란색 몽당연필 모양 사랑 하나 보네.
가끔 가을 준비하느라
여름에 쏟아 놓은 추억들 하나둘씩 주워 담는데,
그 뭉뚝한 사랑은 차마 담을 수가 없네.
그해 여름 막 시작되려던 무렵의 어느 날,
내가 처음 봤던 그 사랑
짙고 꽉 찬 심지와
단단하고 흠집 없는 샛노란 외모 눈부신
그런 사랑이었네.
나는 덜컥 그 사랑 움켜쥐었네.
그 어떤 모양의 그림도,
쓰기 어려운 이야기도 하염없이 그려내고
아름답게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네.
그렇게 그해 여름 한창이던 때,
손에 쥔 사랑 제법 짧아졌네.
짧아지고 금이 간 심지와
내 손톱자국, 이빨 자국 가득한 지친 모습이었네.
그런데도 그 사랑 마냥 원망스러웠네.
왜 이전과 같지 못하느냐고.
그해 여름의 열기 주춤하던 어느 날,
무심코 흰 벽면 가득한 그림과 이야기들 들여다보았네.
하지만 그 사랑 깎아가며 그렸고 써왔던 것들,
포스터물감처럼 짙고 아름다운 노란색 아니었네.
온통 나의 새까만 이기심들뿐이었네.
나의 욕심에 뭉뚝하게 되어버렸네.
그리움도 열정도 모두 깎여 버렸네.
몽당연필처럼 깎인 사랑이었네.
이젠 차마 담지 못할 내 뭉뚝한 그 사랑,
다시 올지도 모를 어느 여름에 되돌릴 수 있을까.
해바라기처럼 길고 꿋꿋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여름 쏟아 놓을 아름답고 풍성한 추억들
한가득 칠할 수 있을까.
그 깊고 두터운 소망 하나 이리도 달랠 수가 없네.
2020년 9월 22일
Whittling Down Love
A lyrical poem quietly whittling down to the essence of love.
condepark.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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