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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Writing/소설 Novel

늘 헐렁한 옷을 입어야만 했던 연우 씨

by Deposo 2021. 3. 21.

연우에게는 옷을 살 때마다 떨쳐버리지 못하는 강박증 같은 것이 있었다. 매번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강박증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야 말았다.

연우의 어릴 적 부모님들은 커다란 양품점을 운영하셨다. 중심 번화가에 있었던 그 양품점은 다양한 연령대의 아동복과 남녀 의류, 잡화, 액세서리와 각종 생활용품은 물론 담배와 고속버스 승차권까지 대행 판매하는 당시로서는 백화점 같은 양품점이었다. 규모가 큰 만큼 직원들도 많아서 한 번에 근무하는 직원 수가 예닐곱 명은 되었다. 기혼자를 빼고는 모두 안집이라고 불리는 매장 뒤의 거주 공간에서 숙식을 해결했으니 실로 대가족이 사는 곳이었다.

그런 고급 양품점 집의 맏아들이던 연우는 어울리지 않게도 늘 헌 옷을 고집했다. 대형 양품점의 안주인이던 연우의 어머니는 매번 연우와 실랑이를 하면서 애를 태워야 했다. 헤지고 색 바랜 옷을 고집하는 큰 녀석이 너무나도 미웠다. 얼르고 야단을 치고 한바탕 소란을 피워도 끝끝내 새 옷을 거부하고 내빼는 녀석 때문에 속이 상했다. 이웃이나 지인들 보기에도 민망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귓전에는 혀를차며 쯧쯧거리는 소리가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고, 저리 좋은 옷을 팔면서도 자식은 저렇게 허름한 옷을 입히네." "세상에나 그 돈 아껴서 뭐할라고 저리도 박하나. 쯧쯧쯧."

연우는 새 옷을 입고서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그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때문에 어렵던 시절, 화려한 고급 아동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새 옷을 입으면 왠지 빳빳하고 거친 느낌이 들어 거북했다. 여러 번의 빨래를 거치며, 팔꿈치나 무릎 부분이 구부러질 때쯤 되면, 그제야 제 몸에 걸맞는 편안함이 들었다. 연우에게는 그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새 옷이 무조건 싫었다. 비록 소매가 줄어 짧고, 바지 단도 쫑긋 치켜 올라갔지만, 아이언맨의 수트처럼 한 몸인 듯 착 달라붙는 헌 옷이 좋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거북함이 있었다. 늘 한 치수 또는 그 보다 더 큰 치수의 새 옷을 입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걸맞지 않은 어떤 딱딱하고 헐렁한 껍데기에 부드러운 몸을 집어넣는 듯한 불편함이 연우를 괴롭혔다. 남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딱 맞는 옷을 입고 물려주면 될 듯도 했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두 살 터울의 바로 아래 동생은 비만형이라 깡마른 연우보다 덩치가 더 컸다. 여섯 살 차이나는 막내에게 물려주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거북이처럼 늘 큰 치수의 옷 속에 몸을 넣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연우가 20대가 되었다. 그런데 20대의 연우는 여전히 치수가 큰 옷을 입고 다녔다. 몸에 꼭 맞는 옷을 차마 살 수가 없었다.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원하는 치수의 옷을 살 수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어릴 적부터 싫었지만 매번 피할 수 없었던 큰 치수의 옷을 입던 버릇이, 이제는 본능처럼 연우를 조종하고 있었다. 딱 맞는 옷을 입으면 오래지 않아 줄어들어 작아질 것만 같은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최소한 10년 이상은 입을 텐데 30대, 40대가 되면 나잇살이 들어서 지금 보다는 더 큰 치수의 옷을 입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늘 큰 치수의 옷을 사는 그 강박 같은 버릇을 결국 떨쳐 버리지 못하고야 말았다.

https://twitter.com/notclare/status/894582074400579584/photo/1


얼마 전 50대 중반이 되어 만난 연우는 놀랍게도 젊었을 때의 몸과 별 다름없이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40대 중반에 이미 전형적인 중년 남성의 몸매로 다시 태어난 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삼 십 년 전의 체중과 큰 차이가 없다며 은근 자랑스레 너스레를 떠는 연우는, 몸매 때문인지 무척이나 활기차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연우의 옷을 입은 품이 왠지 좀 헐렁해 보였다. 나는 물었다.

"혹시 살쪘다가 뺀거야?"
"아니 매번 옷을 살 때마다 언젠가 살이 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치수 큰 옷을 샀는데 살은 안 찌고 맨날 조금 큰 옷을 입고 산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앞날을 대비한다는 게 뭔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근심, 걱정 대신 생각을 하고 살라더니 너무 오지랖 떨다가 이제껏 헐렁한 옷만 입고 살았어. 그래도 살 안 찐 게 어디냐. 나 보기 좋지."
싱거운 웃음을 터뜨리는 연우의 얼굴엔 작은 아쉬움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큰 치수의 옷을 입으며 가끔씩 느꼈을 아쉬움을 나잇살 없는 몸매로 위로하는 연우를 보며 내가 말했다.
"그래, 니 마누라는 좋아하겠다. 인생은 어차피 모두 똔똔이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거야. 나 봐라 나잇살은 좀 있어도 푸근한 옷맵시가 좋아 보이지 않냐."
연우가 잠시 느꼈던 아쉬움만큼의 위로가, 뱃살 좀 어떻게 해보라던 마누라의 핀잔을 덮어 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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